1년



한솔


파란 마음


얼굴 좋아졌네. 약속 시간을 조금 지나 연희동 만둣집에 나타난 진우님이 말했어요. 살이 좀 오르니 보기 좋다고, 어떠냐고, 지낼 만하냐고 물었어요. 빨간 식탁을 앞에 두고 저는 말없이 웃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진우님이 조금 슬펐거든요. 마른 얼굴에 지친 기색이 가득해서, 어쩐지 작아진 듯한 어깨를 바라보고 있자니 막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실없이 웃기만 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서툰 사람. 많고 작은 일에 서툴러서, 안부 묻기조차 어려울 때가 있는 사람. 

잘 지내요 하고 능청스레 되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어떠냐고, 밥은 잘 먹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진우님은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다부진 티를 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요. 안녕을 묻고 듣기에 아직 마음이 좁아서 그랬어요. 


두어 달 병원 생활을 할 때였어요. 한여름이었어요. 처음 병원을 찾은 날, 지금보다 십 킬로가 줄었던 저를 보고 진우님은 하나도 놀라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어요. 성냥개비 같다고 놀리거나 사진을 찍으며 웃거나, 병원 안뜰 벤치에 앉아 당신 사는 얘기를 들려주기 바빴죠. 벤치 뒤로 자란 풀꽃에나 눈길을 두느라 저 역시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몇 번이고 그런 여름날이 있었어요. 


진우님이 떠난 자리에는 그림책이 남았어요. 병실로 돌아와 꽤 오랜만에 혼자서도 크게 웃었던 순간을 기억해요. 아주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 우리는 꼭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읽던 오후였어요. 상처가 나를 살린다는 시를 읽고는 오래도록 운 탓에, 진우님이 아끼던 시집이 얼룩지기도 했어요.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책을 돌려주며 민망해하는 제게 진우님은, 책은 책일 뿐이랬어요.


그때는 몰랐어요. 열이 많은 진우님이 여름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푹푹 찌는 날씨에 잔뜩 책을 품에 안고 뻘뻘 땀을 흘려가며, 온통 아픈 사람뿐인 병원에 비실비실 약한 티를 내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수고로움을. 견뎌라 버텨라 말하는 대신 당신이 거기 있음을 짐작하도록 돕는 깊은 마음을. 그 모든 게 살아보라는, 살아보자는 말이었다는 것까지도요.


진우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어린 날의 제게 생애와 태도를 알려준 사람. 너무 사랑해서 매일 이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사람. 깨어질 듯 위태롭다가도 어떤 기세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 날마다 부끄러워하면서 견실히 내일을 마련하는 사람. 하늘과 시와 바다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 춤추듯 쓰고 그리고 잇고 짓는 사람. 산 사람을 살리는 사람. 무엇보다 고마워하는 사람.


저는 여전히 서툰 사람이에요. 자주 부딪히고 넘어지는 사람. 자꾸 휘어지고 비틀대는 사람. 틈만 나면 울고 앓는 사람. 선물을 고르는 일도 위로를 말하는 일도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도 능숙하지 못한 사람. 모자라고 연약하고 흐트러진 사람. 어쩌면 영영 그럴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 저를 진우님은 점장님이라 불러요.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이름에 겨우 뒤돌아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날 만둣집에서 진우님은 서점을 열 거라고, 함께해 줄 수 있겠냐고, 딱 일 년만 같이 망가져 보자고 그랬어요. 물만두와 군만두와 칭따오를 번갈아 먹으면서 처참해져 보자니. 진우님 다워서 그러자 했어요. 서점 이름이 뭐냐고 묻자 진우님 얼굴에 언뜻 빛이 올랐어요. 블루도어북스, 라고 했어요. 블루도어가 뭐냐고 묻자 진우님이 씩 웃었어요. 모두가 마음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 문이랬어요. 


그때 제 안 깊은 곳에도 파란 문이 하나 생겼어요.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다고, 우리는 살면서 배워야 한다고, 어떤 다정과 친절은 구원이 되기도 한다고 믿는 문이요. 꼭 일 년째인 오늘도 여전히 문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칠이 좀 벗겨지고 끼익 소리를 내면서도 굳건하게요. 이 자리를 빌려 진우님에게 고마움을 전해요.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진우님.


가득한 일 년이었어요. 벽을 덮고 카펫을 깔고 선반을 세우고 서가를 채우고 배관을 감싸고 모빌을 달던 날들. 보리차를 따르고 커피를 내리고 조명을 밝히고 향을 태우고 찻잔을 씻고 담요를 접던 시간들. 문을 열고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고 책을 전하고 손을 흔들던 순간들까지도. 모두와 이곳을 여전히 만들어가는 중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만둣집 한가운데서 시작된 긴 긴 여정을 앞으로도 가능한 성실하고 반듯하게 그리고 싶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가지고 있는 파란 문을, 잠시 잊고 지내던 무언가와 만나는 그 문을, 기꺼이 두드려 열 수 있도록 저희는 늘 이 자리에 있을게요. 하나도 같지 않아서 아름다운 파랑인 채로요. 기댈 곳이 필요한 날에 들러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니까요.


지난 네 계절, 블루도어북스를 찾아주시고, 아낌없는 응원 전해주신 손님들 고맙습니다. 멀리서 지켜봐 주시는 손님들께도 감사해요. 거기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 정말 커다란 보탬이 돼요. 무엇보다, 찬 계절 몸 건강히, 마음 넉넉히 지나시기를 바래요.  꼭 한 번은 크게 웃는 매일 지내시기를요. 아, 손님 여러분의 파란 문은 어떤 건지 궁금해요. 이야기 들려주실래요?




2024년 10월 24일


블루도어북스, 한솔




규형




회색빛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블루도어북스의 문을 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따듯하고 아름다운 서점이었습니다. 그 웃음을 잊을 수 없어, 한번, 두 번, 세 번 찾았던 서점에서 저는 어느새 명찰을 달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막연히 궁금했습니다. 어떤 삶과 마음이길래 이런 공간을 만들고, 지켜나갈 수 있는 걸까 묻고 싶었습니다. 아니, 단순히 묻기보다는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알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느낄 수는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블루도어북스의 일상들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녔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노력하는 나날들과 고된 일상의 반복, 그럼에도 힘을 내서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쌓여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함께 하는 동료들도 철인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묻게 되는 일상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우 님과 한솔 님은 그런 짙은 순간 속에서도 웃고,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굳건히 지켜나가려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지와 배려로 저는 그들과 긴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지금의 저는 여러 이유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확히 똑같은 역할과 노력을 요구받는 자리에서 예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삶은 더 이상 회색빛이 아닙니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지켜나가던 동료들 - 한솔 님과 진우 님- 의 태도가 나에게도 푸르게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곧 제가 블루도어북스의 문을 처음 연지 1년이 됩니다. 저는 그때와는 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푸른 문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하루하루와 매일 이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일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일상을 선물해 준 사랑하는 진우 대표님과 한솔 점장님,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찾아와주셨던 고객님들의 1년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0월 24일


블루도어북스, 규형




진우




어제 잠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산 하나 팔려 너무 좋아 계단에서 울던 그 시절부터, 식당을 하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모든 순간들이 그저 한순간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이 또 너무 생생해서 말도 안 되게 희미한 느낌입니다. 잘해보려 애쓰다 되려 먼길 오신 분들을 속상하게 한날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삶은 늘 그런 방향으로 기어코 기울어져있어 반대로 달리며 매일 매일, 애먼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작년 여름, 연희동 만둣집에서 나눈 이야기가 이렇게 커지고 속상하고 사랑스러워질 줄은 저도 잘 몰랐습니다. 

늘 한솔 님에게, 나의 유일한 선생님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블루도어북스의 정말 작은 소망은, 


모두들 아주아주 잠시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을 다시 만나는 세상.


아주 작고 작은 욕심으로 늘 바라왔습니다. 이 부족한 공간에서 그간을 잠시 돌아보고 조망하며 아주 작아서 너무 소중하단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그 느낌으로 또 해볼 만한 무언가를 만나셨다면.


자주 문의하시는 질문에 왜 서점 문색이 파란색이 아니냐고 말씀 주세요.


파란 문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 색은 모두가 다를 것이기에, 또 그렇기에 내 것이어서, 내 눈에만 보이고 내 눈으로 보고 싶기에 어느 한색으로 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느꼈던' 그 모든 것들이 유일한 Bluedoor 입니다.


기쁘게 쓰고 싶었는데 쓰다 보니 반성문이네요.


고마운 사람들이 잠을 잘 때마다 생각이 납니다. 진심으로 고마움이 너무 깊어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만으로도 제 손끝에서 낙엽이 지는 기분입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어떻게든 해보라며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믿어주셔서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을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모르나 눈물이 너무 많습니다. 살다 보면 이 세상에는 울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들뿐인데 그래서 산책을 하며 자주 제 발밑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두고 왔나, 무엇을 잊고 지냈나, 중요한 것만 생각하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일 또 인사드려요.






2024년 10월 24일


블루도어북스, 진우